기축통화의 힘: 왜 전 세계는 달러의 눈치를 볼까?
해외여행을 가서 현지 식당이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혹시 한국 돈 5만 원권이나 1만 원권을 내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 대부분의 상인이 고개를 저으며 받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갑에서 미국 달러를 꺼내면 어떨까요? 베트남의 야시장 노점상이든, 유럽의 명품 매장이든, 아프리카의 오지 마을이든 달러는 마치 만능열쇠처럼 환영받습니다.
제가 투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의아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삼성전자도 세계 1등이고 K-팝도 난리인데, 왜 우리 돈 원화는 해외에서 휴지 조각 취급을 받고, 미국 돈 달러는 귀하신 몸 대접을 받을까?" 이 단순한 호기심이 경제 공부의 깊이를 더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축통화(Key Currency)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 금융 시장은 사실상 달러라는 혈액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유기체와 같습니다. 한국 주식이 왜 미국 금리에 춤을 추는지, 왜 경제 위기가 오면 환율이 폭등하는지 이해하려면 이 기축통화의 절대 권력을 먼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은 전 세계가 미국 연준의 입만 바라보게 만드는 달러의 위력과,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1. 기축통화: 전 세계 금융의 공용어
기축통화란 국제 간의 결제나 금융 거래에서 기본이 되는 통화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돈의 세계 공용어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못해도 보디랭귀지로 소통할 수는 있지만, 비즈니스를 하려면 영어가 필수인 것처럼, 국가 간 무역을 하려면 달러가 필수입니다.
전 세계 외환 보유고의 약 60%가 달러로 채워져 있습니다. 유로화, 엔화, 파운드화, 그리고 최근 급부상한 위안화까지 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1위는 달러입니다.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를 사 올 때 원화를 주면 받아줄까요? 절대 안 받아줍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한국 돈을 받아봤자 쓸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출해서 번 달러를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그 달러로 석유를 결제합니다.
이것이 바로 달러의 힘입니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무언가 중요한 것(석유, 식량, 반도체 장비 등)을 사려면 반드시 달러를 구해야만 합니다. 즉, 달러에 대한 수요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 2. 미국은 어떻게 슈퍼 파워가 되었나: 페트로 달러의 비밀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배경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브레튼우즈 체제 등 복잡한 역사가 있지만, 투자자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핵심은 바로 페트로 달러(Petrodollar) 시스템입니다.
1970년대,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 협약을 맺습니다. "너희 나라 안보는 우리가 미군을 보내서 지켜줄게. 대신 너희는 전 세계에 석유를 팔 때 오직 달러로만 결제하게 해." 이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석유 없이는 공장을 돌릴 수도, 차를 굴릴 수도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석유를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 석유를 사려면 무조건 달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시스템 덕분에 전 세계는 끊임없이 달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미국은 종이에 잉크만 칠해서 달러를 찍어내면 그 돈으로 전 세계의 물건과 자원을 쇼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피땀 흘려 물건을 만들어 수출해야 달러를 얻을 수 있는데, 미국은 윤전기만 돌리면 되는 것이죠. 이를 경제학에서는 미국의 터무니없는 특권(Exorbitant Privilege)이라고 부릅니다.
## 3.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의 설움: 한국의 트라우마
그렇다면 기축통화국이 아닌, 우리 같은 비기축통화국은 어떤 운명을 겪게 될까요? 우리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그 설움을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빚을 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는데, 해외에서 빌려온 돈을 갚을 달러가 바닥난 것입니다(외환 보유고 고갈). 나라 곳간에 달러가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져 한국을 탈출했고, 환율은 2,0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굴욕적인 구조조정을 당해야 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어떨까요? 2008년 금융위기나 2020년 코로나 위기 때, 미국은 상상도 못 할 규모의 돈을 찍어내서(양적 완화) 위기를 넘겼습니다. 만약 한국이 원화를 그렇게 찍어냈다면 화폐 가치가 폭락해서 나라가 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면 전 세계가 그 인플레이션을 나눠서 부담해 줍니다. 달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니까요. 이것이 기축통화국과 비기축통화국의 결정적인 차이, 즉 체급의 차이입니다.
## 4. 왜 세계는 아직도 달러를 믿을까?
중국의 위안화가 달러에 도전한다거나, 비트코인이 달러를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투자자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달러의 아성을 넘볼 화폐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뢰(Trust) 때문입니다.
화폐의 가치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국방력에서 나옵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같은 혁신 기업들이 끊임없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나라입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의 머릿속에는 "지구가 망해도 미국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발 금융 위기가 터져도 사람들은 달러를 삽니다. 미국이 위험하면 전 세계가 위험하다는 뜻이고, 그럴 바엔 제일 안전한 미국 돈을 들고 있는 게 낫다는 심리 때문입니다. 이를 안전 자산 선호 현상이라고 합니다.
## 5. 투자자의 생존 전략: 달러 스마일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저는 포트폴리오의 일정 부분(최소 10~20%)을 반드시 달러 자산으로 보유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달러는 내 자산의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 주식과 부동산 가격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때 환율은 급등합니다. 내가 가진 원화 자산의 가치가 떨어질 때, 내가 미리 사둔 달러의 가치는 폭등하여 전체 자산의 손실을 방어해 주는 것입니다.
이를 달러 스마일(Dollar Smile) 이론이라고도 합니다.
미국 경기가 아주 좋을 때: 미국 주식 하려고 달러가 강세.
전 세계 경기가 아주 나쁠 때: 안전 자산 찾느라 달러가 강세.
즉, 달러는 웃는 입모양처럼 양쪽 끝(호황과 불황)에서 모두 강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원화만 100% 들고 있는 것은 한국 경제라는 바구니에 내 모든 달걀을 담아두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미국 주식에 투자하든, 달러 예금을 들든, 달러 ETF를 사든, 달러 노출 비중을 높이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 핵심 요약
돈의 계급: 달러는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기축통화이며, 원화는 한국 안에서만 통하는 로컬 통화입니다. 이 체급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페트로 달러: 석유를 비롯한 주요 원자재 결제는 달러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달러 수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미국의 특권: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위기 시 돈을 찍어내 해결할 수 있지만, 비기축통화국은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면 국가 부도 위기를 맞습니다.
자산의 방패: 경제 위기 시 달러 가치는 급등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달러 자산을 보유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위기 관리 수단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지갑이나 통장에는 달러가 얼마나 들어있나요? 해외여행 후 남은 10달러짜리 몇 장이 전부인가요, 아니면 위기를 대비한 달러 자산이 준비되어 있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달러 투자 현황이나 계획을 공유해 주세요!
댓글
댓글 쓰기
질문 환영합니다 !